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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대 다사리고 뱃밥을 박앋나냐 <동사2>
이처럼 고산은 어부사시사에서 주로 순우리말을 사용함으로써, 국문 경시 풍조가 만연하던 시기에 국어 애호(國語愛好)의 실천자였으며 동시에 운율적 효과를 높이고 시의(詩意)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2.2.3 음수율(音數律)의 파격(破格)
송강정철의 문학 세계는 당대의 자연적, 사회적 환경과 사우(師友)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송강은 을사사화로 말미암아 15세까지는 거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가 16세 되던해 부친의 귀양살이가 풀려, 부친을 따라 선조의 묘소가 있는 호남 창평으로 내려와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고산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은 그 작가가 처한 시대와 자신의 인생관이 반영된 것으로 볼 때, 한 작가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생애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송강의 생애는 기본이 남달랐다. 정쟁의
고산은 공조좌랑과 한성부서윤, 시강원문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정치적으로 가장 득의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나 서인들의 견제를 견디지 못하고 고산은 1634년(인조12년)에 48세의 나이로 성주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결국 해남에 은거하기에 이른다.
해남에 은거하고 있던 고산에게 두 번째 전
생활과 한가한 정서를 읊은 것이“산중신곡”, “속 산중신곡“들이었고,65세(효종2,1651)에 보길도의 춘하추동을 배경으로 지은 것이 ”어부사시사“이다. 금쇄동과 보길도 부용동은 윤선도 시가문학의 2대 산실이 된 것이다.
효종이 즉위한 후 봉림대군 시절의 사부였던 윤선도를 불러 동부승지, 예
, 박상으로부터 송순, 정철에 이르기까지 빼어난 시인들을 배태(胚胎)한 전통의 예향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입양되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인생을 물질적인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약속이 되었음과 동시에, 고산 특유의 깊은 감수성을 키워나갈 수 있게 해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문학이 현대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정철은 서인세력이었는데, 당쟁으로 인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논척을 받고 사직하여 고향인 창평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자신을 이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에 빗대어 군왕 선조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었다.
이 장에서는 고전시가강독2공통 1. 고려속요 가
가려졌는고(8)/ 벌써 밤이 들어 자규소리 들리나 남은 흥이 무궁하여 갈 길을 잊겠다(9)/ 내일을 기약하며 집을 찾으니 어부 생애는 이럭 저럭 지낼만 하구나(10).
위의 <봄> 노래에서 두드러지는 내용은 탁영가의 흥이 나고, 삼공만사가 부럽지 않으며 어부생활은 이럭저럭 지낼 만하다는 것이다.